벼랑 끝에 선 자본주의, 생존을 위한 선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중국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핵무기로 무장한 두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전례 없는 공포에 직면했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도미노처럼 공산화가 진행되는 것을 목격한 자본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은 뼈아픈 현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만약 19세기처럼 자본가들이 무한한 이윤 추구에만 몰두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면, 분노한 노동자들이 총을 들고 공산당에 가입해 내부에서부터 체제를 전복시킬 위험이 명백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생존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자본가들의 막대한 기득권을 법으로 제한하고,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평등과 분배의 요소를 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끌어안는 대담한 이념적 타협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지국가라는 방패의 탄생과 황금기

체제 붕괴의 위기감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복지국가 모델입니다. 영국의 베버리지 보고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모든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여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정부는 부유한 자본가와 대기업에 무거운 누진세를 부과하여, 그 재원으로 무상 의료, 무상 교육, 실업 수당, 노령 연금 제도를 대폭 확충했습니다. 노동조합의 권력을 법적으로 강력히 보장하여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적 타협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되었으며,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상승하면서 자본주의는 유례없는 대호황을 누렸습니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불리며, 인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피를 흘리지 않고도 부를 나누며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오일쇼크와 복지국가의 균열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황금기는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경제 성장의 엔진이 멈추자, 국가가 촘촘하게 구축한 방대한 복지 제도는 오히려 국가 재정을 파탄 내는 무거운 짐으로 전락했습니다.

복지국가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외형적으로는 부를 나누는 훌륭한 제도를 갖추었지만, 그 제도를 떠받치는 근본 동기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자본가들이 천문학적인 세금을 낸 것은 가난한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지불한 체제 유지용 보험료에 불과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혜택을 받는 노동자들 역시 국가의 복지를 감사함이 아니라 마땅한 권리로만 여기며 점차 근로 의욕을 상실하고 나태한 무임승차자로 전락해 갔습니다. 형제애와 진정한 동기가 결여된 국가 주도의 강제적 부의 재분배는 결국 경제적 효율성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인간 본연의 자발적 책임 의식을 마비시키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역습, 다시 빗장이 풀린 탐욕

비대해진 복지국가가 휘청거리자, 그 틈을 타 새로운 사상적 조류가 거세게 밀려왔습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 등이 주창한 신자유주의는 "국가는 경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모든 것을 시장의 자유경쟁에 맡겨라"고 외쳤습니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총리는 이 사상을 적극 수용하여 복지를 축소하고 부자들의 세금을 대폭 감면하며 기업 규제를 철폐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면서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가 선언되자, 비극은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체제를 위협하던 공산주의라는 늑대가 사라지자, 자본가들은 더 이상 노동자들의 눈치를 보며 세금을 내고 복지를 지원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규제의 빗장이 풀린 자본주의는 억눌려 있던 본래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냈습니다. 승자독식, 무한 경쟁, 노동의 유연화라는 미명 아래 오늘날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해버렸습니다.

거대 플랫폼 기업과 다국적 자본은 전 세계의 부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으며,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는 금융 자본의 투기 앞에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수십억 명의 민중들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절대 빈곤과 빚더미 속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습니다. 강자만이 모든 것을 독식하고 약자는 철저히 도태되는 기형적이고 잔인한 양극화의 괴물이 다시 지구촌을 집어삼킨 것입니다.

중심 잃은 시계추의 비극

지난 100년간 인류 역사는 극단적 평등을 추구한 공산주의와 극단적 자유를 추구한 신자유주의 사이를 시계추처럼 위태롭게 오가며 사상적 혼란과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짓밟고 억지로 평등을 맞추려다 수천만 명을 학살하는 지옥을 만들었고,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만을 극대화하려다 평등을 파괴하여 강자독식과 소외의 지옥을 만들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숭고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구심점이 빠져버리면, 자유는 이기적인 방종과 탐욕이 되어버리고 평등은 타인을 짓누르는 폭력과 억압으로 타락하고 맙니다. 공산주의의 비참한 몰락도, 신자유주의가 낳은 절망적인 빈부격차도 우리에게 단 하나의 명백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인간의 이성과 이데올로기, 제도적 조작만으로는 결코 잃어버린 이상세계를 이룩할 수 없다는 뼈아픈 결론입니다.

이데올로기의 무덤 위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다

인류는 헬레니즘의 과학적 이성으로 낙원을 지으려 했고, 헤브라이즘의 신앙으로 타락한 마음을 정화하려 했습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로 제도를 상상했고, 칸트의 철학으로 유물론을 막아섰으며, 로버트 오웬의 자본으로 협동조합의 실체를 세우고, 복지국가의 제도로 불평등의 골짜기를 메워보려 발버둥 쳤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위대하고 숭고했던 인류의 도전들은 원죄에 뿌리를 둔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타락성을 치료하지 못한 채, 결국 이데올로기의 무덤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힘을 숭배하는 우익의 탐욕도 정답이 아니며, 증오를 불태우는 좌익의 분노도 정답이 아닙니다.

이 거대한 역사적 절망과 이념의 폐허 끝자락에서, 인류는 좌익과 우익의 꺾인 두 날개를 온전히 융합하고 새로운 차원의 생명적 방향을 제시해 줄 우주적인 머리, 즉 두익사상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죽이고 미워하던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외부적인 제도의 혁명이 아닌 내면의 심정의 혁명을 통해 이 땅에 공생·공영·공의의 신통일세계를 실체로 건설할 새로운 비전이 필요합니다.

피로 얼룩진 과거의 투쟁 역사를 뒤로하고, 인류는 진정한 사랑과 참된 가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의 길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시계추는 이제 그 중심을 되찾아야 하며, 그 중심은 제도나 사상이 아닌 인간의 본질적 변화와 심정의 회복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