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20세기 구조주의 사상가들은 충격적인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인간의 사유는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는 언어와 문화의 구조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 보이지 않는 격자 감옥 안에서의 제한된 움직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가 발견한 바둑판의 비밀
185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이자 구조주의의 시조입니다. 그는 언어가 단순히 내면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언어라는 거대한 체계가 인간의 사고방식과 세계 인식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혁명적 발견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체의 죽음이라는 개념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소쉬르는 이 구조의 지배력을 설명하기 위해 바둑판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바둑판 위에서 개별 바둑돌 자체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돌이 바둑판의 격자망 중에서 정확히 어느 지점에 놓여 있으며, 다른 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돌의 가치는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돌들과의 차이와 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사회적 구조라는 거대한 바둑판 위의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이 소쉬르의 통찰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소쉬르는 생전에 자신의 이론을 책으로 직접 출판하지 않았습니다. 1907년에서 1911년 사이 제네바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1913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동료 교수들이 학생들의 강의 노트를 수집하고 편집하여 1916년 『일반언어학 강의』를 사후 출판했습니다. 저자가 단 한 글자도 직접 쓰지 않은 책이 20세기 인문학 전체를 뒤흔든 최고의 고전이 된 것입니다. 이 사실 자체가 구조주의의 핵심을 증명합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무지개는 정말 일곱 가지 색일까
소쉬르의 기호학이 던진 가장 강력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계일까요, 아니면 언어라는 안경을 통해 분절되고 구성된 세계일까요. 그 답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무지개의 색깔입니다.
우리는 무지개가 당연히 일곱 가지 색깔로 나뉘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 자연계의 무지개는 수많은 빛의 스펙트럼이 단절 없이 연속되는 파동일 뿐입니다. 그것이 일곱 색깔로 인지되는 이유는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 체계가 그 연속적인 빛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일곱 개의 칸으로 쪼개어 단어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색채 단어를 세 가지만 사용하는 아마존의 특정 부족들에게 무지개는 완벽한 세 가지 색의 띠로만 지각됩니다.
소쉬르는 언어의 최소 단위를 기호라고 명명하고, 이를 물리적 소리인 기표와 정신적 개념인 기의의 결합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으며, 오직 언어 공동체의 사회적 약속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기호의 자의성 원리입니다. 붉은 과실을 한국어로 사과라 부르든 영어로 애플이라 부르든, 그것은 순전히 임의적 약속일 뿐입니다. 진리는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호들이 맺는 차이와 관계의 격자망 속에만 존재합니다.
레비-스트로스와 야생의 사고
1908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구조를 문화인류학으로 확장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파리의 안락한 서재를 떠나 브라질 아마존 정글로 들어가 남비콰라족과 투피카와히브족 같은 원주민 부족들과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겉으로는 원시적으로 보이던 야생 부족들의 신화와 친족 체계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그 속에는 근대 서구 과학 못지않게 정교하고 유기적인 보편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전 세계 야생 신화를 비교 분석하여, 인간의 뇌는 어디서나 세상을 두 대립하는 요소로 짝지어 분류하는 이항대립의 구조를 발동한다는 원리를 증명했습니다.
인류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삶과 죽음, 자연과 문화, 성과 속이라는 대립하는 축을 통해 우주와 사회의 질서를 건축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인간이 신화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의 뇌를 빌려 스스로 생각할 뿐이라고. 이 주장은 서구 문명만이 우월하다는 오만을 격파하고 문화상대주의의 주초를 놓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2009년 101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주체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자신은 강렬한 개성을 지닌 주체로서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를 탈출하여 뉴욕으로 망명하며 극적으로 생존했습니다. 또한 그는 원주민 문화의 찬란함을 발견했지만, 바로 그 문화가 서구 물질문명에 의해 파괴되는 과정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의 명저 『슬픈 열대』는 이 모순을 고백한 책이었습니다.
롤랑 바르트와 저자의 죽음
구조주의의 씨앗은 문학 비평의 영토로도 확장되었습니다. 그 전위에 선 사람이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였습니다. 그는 1968년 충격적인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제목은 「저자의 죽음」이었습니다.
바르트의 논지는 간결했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그것을 쓴 저자의 의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 속에서 매번 새롭게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죽어야 독자가 삽니다. 성경을 예로 들면, 성경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이나 저자들의 의도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각 시대 각 독자가 텍스트와 대면하는 순간마다 새롭게 생성된다는 주장입니다.
1957년 발표한 『신화론』에서 바르트는 소쉬르의 기호학을 현대 대중문화 비판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프로 레슬링, 세제 광고 같은 평범한 일상의 이미지들이 사실은 특정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위장하는 신화로 작동한다는 분석이었습니다. 기호학은 그 위장된 포장지를 벗겨내는 해독 도구가 됩니다.
1970년 바르트는 『기호의 제국』에서 일본을 기호들이 내용 없이 순수하게 유통되는 이상적 체계로 묘사했습니다. 그에게 일본의 하이쿠, 스시, 포장 문화는 서양의 의미 강박에서 해방된 가벼운 기호의 놀이처럼 보였습니다. 이 책은 일본 분석이라기보다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역설적 비판으로 읽혀야 합니다.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로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로, 바르트로 이어지는 구조주의의 전개는 1960년대 후반 스스로의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구조가 인간을 결정한다면 구조 자체는 무엇이 결정하는가. 보편적 구조가 있다고 했지만, 그 구조를 발견하고 기술하는 서구 학자 자신도 서구적 구조에 갇힌 존재가 아닌가.
이 자기 모순의 발견이 포스트구조주의로의 이행을 촉발했습니다. 구조의 고정성을 해체한 데리다, 구조 뒤에 숨은 권력을 폭로한 푸코는 구조주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구조주의의 무덤을 판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조주의는 인간을 구조의 감옥에 가뒀지만, 동시에 그 감옥의 존재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만든 사상이기도 합니다. 감옥을 알아야 탈출을 꿈꿀 수 있습니다.
알고리즘의 시대와 구조 결정론의 반복
소쉬르의 통찰을 현재어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알고리즘이 사유를 결정합니다.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이 우리가 시청할 영상을 정하고, 인스타그램 피드가 우리가 욕망할 것을 결정하며, 검색 엔진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범위를 규정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내가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구조가 우리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발견한 이항대립의 보편 구조는 통일사상 원상론의 이성성상과 표면적으로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성성상을 닮아 피조 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문화의 심층에서 그 이중 구조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설계도를 발견하고 경탄했지만, 설계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설계도 뒤에는 설계자의 꿈이 있습니다.
통일사상 인식론의 관점에서 구조주의의 핵심 한계는 명확합니다. 구조주의는 인간 주체의 능동적 인식 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부정합니다. 소쉬르에게 언어 체계는 개인의 선택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제도이며, 개인의 언어 행위는 이 체계에 의해 규정됩니다. 하지만 통일사상 존재론에서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이며, 구조에 대해서도 주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 세계의 주관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구조를 이해하고 활용하되 구조에 종속되지 않는 주체적 인간상, 이것이 구조주의가 놓친 인간의 본래적 위상입니다. 문법을 알아야 글을 쓸 수 있지만, 문법이 시인의 감동을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문법을 도구로 사용하되 문법 너머의 심정을 표현합니다. 알고리즘이 영상을 추천하더라도, 그 추천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적 판단입니다. 언어의 구조도 알고리즘의 구조도 도구이지 감옥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체성을 유지하는 한, 그리고 그 주체성의 뿌리는 이성성상의 구조를 심어주신 하나님과의 심정적 관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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