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신학적 논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교리 논쟁을 넘어 교회의 분열과 유혈 사태까지 불러일으킨 뼈아픈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이자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인간 예수를, 어떻게 천지를 창조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딜레마는 초대 교회 이래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영적 고민으로 남아 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 그리고 신비의 상자

4세기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는 "예수는 피조물 중 으뜸일 뿐, 창조주 성부 하나님보다는 열등하다"고 주장하며 교회를 거대한 분열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에 맞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와 성부는 본질이 같다"고 선언하며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두고 수백 년 동안 동서방 교회는 서로를 이단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신성을 너무 강조하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고통이 가짜가 되는 가현설의 오류에 빠지고, 인성을 너무 강조하면 인류의 죄를 대속할 구원의 능력이 의심받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분열을 종식하기 위해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격론 끝에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다. 이 두 본성은 섞이거나 변하지 않고 나뉘거나 갈라지지 않는다"라는 기독론의 최종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구원 능력과 인간으로서 겪으신 십자가의 숭고한 희생을 모두 지켜내려 했던 눈물겨운 신학적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는 100% 무한한 창조주이면서 동시에 100% 유한한 피조물이라는 모순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이 합리적인 질문을 '신비'라는 이름의 굳게 닫힌 교리의 상자에 가두어 버렸고, 그 결과 후대의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서 목수로서 땀 흘리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울며 호흡하시던 예수님의 따뜻한 체취를 점차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우주적 가치

원리강론은 이 해묵은 기독론의 신비를 창조원리를 통해 명쾌하고도 과학적으로 풀어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교리에 갇힌 신학적 논쟁을 멈추고 타락하지 않고 창조목적을 완성한 본연의 인간이 얼마나 엄청난 우주적 가치를 지닌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늘부모님의 3대 축복을 온전히 이루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 삼고 마음과 몸이 완벽하게 일체를 이룬 신인애일체의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과 공명하며, 그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또한 완성된 인간은 보이지 않는 영계와 보이는 육계를 모두 주관할 수 있도록 우주의 모든 요소를 총합하여 지음받은 실체상이므로, 천주를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므로, 그 체를 쓰고 대상의 자리에 선 완성된 인간 역시 하나님의 영원성을 상속받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복음 14:9)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이 곧 조물주라는 신비주의적 은유가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원리적 진리입니다. 창조목적을 100% 완성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과 심정은 곧 보이지 않는 하늘부모님의 실체적 발현이자 완벽한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한 분인가

그렇다면 우주적인 가치를 지니고 하나님과 일체 되신 예수님은 우주의 제1원인자이신 창조주 하나님 그 자신과 완벽히 동일한 분일까요? 원리강론은 여기서 기성 신학을 향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무한한 가치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끓어오르는 사랑과 창조의 힘에 의해 지음받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무형의 창조주가 아니시라, 창조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어낸 완성된 인간이십니다.

태양이 아무리 눈부시게 빛난다 하더라도 보름달이 그 태양 빛을 100% 완벽하게 반사한다고 해서 태양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듯이, 예수님은 하늘부모님의 심정과 속성을 완벽하게 실체로 반사하는 참된 인간이시지 창조주 하늘부모님 그 자신은 아니십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이유는 타락으로 인해 쓰레기장처럼 흉측하게 변해버린 인간의 가치에 비해 예수님의 가치가 너무나도 찬란하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리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을 완성된 인간으로 보는 것은 결코 예수님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불경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본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성장했다면 마땅히 도달했어야 할 인간 본연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명해 주신 최초의 롤모델로서의 영광을 온전히 되찾아드리는 섭리적 해방입니다.

원죄의 유무, 타락 인간과 예수님의 결정적 차이

그렇다면 예수님이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면,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요? 타락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는 인간의 얄팍한 노력이나 수양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가 단 하나 존재합니다. 바로 원죄의 유무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사탄의 거짓된 핏줄을 이어받아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라는 치명적인 독을 혈관 속에 품고 있습니다. 진흙탕 속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스스로 맑은 생수가 될 수 없듯, 타락한 인간은 제아무리 뼈를 깎는 수양을 하고 율법을 지켜도 혈통에 깊이 새겨진 원죄의 족쇄를 스스로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참소 조건이 전혀 없는 하늘의 선한 핏줄을 안고, 즉 원죄 없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탕감복귀 섭리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피눈물로 준비한 성별된 핏줄을 통해 오셨기에, 사탄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온전한 독생자이셨습니다. 오직 생명줄이 사탄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이 맑고 순결한 예수님만이, 사탄의 주관권에 갇혀 죽어가는 인류를 구출하고 하나님의 혈통으로 다시 접붙여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격을 지니신 것입니다.

심판관이 아닌 참부모로 오신 메시아

성서는 예수님을 일컬어 "마지막 아담"(고린도전서 15:45)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2천 년 기독교인들이 오해해 온 것처럼 구름을 타고 와서 불과 유황으로 세상을 심판하여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하여 잃어버렸던 그 위치를 고스란히 되찾아 세우기 위해 제2의 아담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부모님을 중심 삼고 해와와 온전히 하나 되어 가정을 이루고, 죄 없고 흠 없는 인류의 선한 조상이 되는 것, 즉 참부모가 되는 우주적 비전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본연적 사명은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며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서 이 땅에서 사탄의 혈통과 무관하게 준비된 실체적인 신부를 만나 어린양 잔치를 치르고, 죄 없는 선한 자녀를 번식하여 인류의 실체적인 참부모로 등극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잃어버리고 사탄의 핏줄을 물려받아 고아로 전락한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구원자는 율법의 몽둥이를 든 심판관이 아닙니다. 끊어진 혈통의 탯줄을 다시 하늘에 이어주고, 상처받은 영혼을 품에 안아 눈물을 닦아주며 새 생명으로 낳아주실 참부모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탕감과 재림의 약속

그러나 섭리 역사상 가장 통탄할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참부모로 모시고 어린양 잔치를 기쁨으로 준비해야 할 세례 요한과 유대 민족이 끝내 무지함과 불신으로 돌아서 버린 것입니다. 신부를 맞이하여 지상천국을 이룩하려던 예수님의 참부모 사명은 철저히 좌절되었고, 결국 예수님은 인류를 영적으로라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 대속의 피를 사탄에게 내어주는 참혹한 제물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로 인류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 영적 중생의 길을 열었으나, 육신을 쓰고 실체적인 참가정을 이룩하는 구원의 궁극적 완성은 다시 오실 재림의 때로 아득하게 미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재림주님께서 2천 년 전처럼 구름이 아닌 육신을 쓰고 이 땅에 실체로 다시 오셔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입니다.

다시 오실 메시아는 세상을 불태우는 심판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지 못하셨던 실체적 신부를 찾아 기어이 참부모의 인연을 맺으러 오시는 분입니다. 수천 년 역사가 피눈물로 고대해 온 독생자 참아버님과 하늘이 오랜 세월 예비하신 독생녀 참어머님께서 마침내 한 자리에 서시어 거룩한 어린양 잔치를 거행하실 때, 인류는 비로소 심판의 두려움을 영원히 끝내고 영육을 아우른 구원의 품, 참부모님의 따뜻한 품에 온전히 안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