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가족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거나, 참혹한 전쟁과 자연재해로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될 때 인간은 하늘을 원망하며 묻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째서 이런 끔찍한 비극을 허락하셨는가? 이 모든 고통조차 다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인가?" 기독교 역사는 이 고통스러운 질문 앞에서 수백 년간 치열한 신학적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칼뱅의 이중예정론과 치열했던 신학적 전쟁
16세기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이중예정론이라는 단호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주가 창조되기 전부터 구원받아 천국에 갈 자와 멸망하여 지옥에 떨어질 자를 이미 완벽하게 정해 놓으셨다는 주장입니다. 칼뱅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의 선행이나 피나는 노력, 간절한 회개의 기도는 구원의 결과를 결코 바꿀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 아래 톱니바퀴처럼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가혹한 교리는 기독교 내부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신학자 아르미니우스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칼뱅의 이중예정론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맹목적인 폭군이 아니시며,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자유의지로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칼뱅주의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에는 수백 년 동안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며 격렬하게 대립하는 신학적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치열한 논쟁은 결국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기독교인들을 깊은 신앙적 딜레마에 빠뜨렸습니다. 칼뱅의 극단적인 예정론을 따르자니 인간은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무기력한 운명론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더욱이 내가 짓는 끔찍한 죄악조차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신 것이 되어, 타락과 범죄의 책임마저 창조주께 돌려버리는 치명적 모순에 직면합니다. 신의 전지전능함을 찬양하려다 오히려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만들어버린 셈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너무 강조하면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절대성이 흔들리는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뜻에 대한 절대적 예정,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하늘의 꿈
통일원리는 이 해묵은 신학적 딜레마를 세 가지 명확한 기준으로 구분하여 풀어냅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뜻에 대한 예정입니다. 하늘부모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실 때 가슴 벅차게 품으셨던 궁극적인 목적, 즉 삼대 축복이 실체로 완성된 지상천국을 이룩하시겠다는 그 거룩한 뜻만큼은 백 퍼센트 절대적이고 불변하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절대적이신 분이므로 당신이 세우신 창조의 목적 역시 중간에 포기되거나 상황에 따라 임의로 수정될 수 없습니다.
비록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그 웅장했던 뜻이 무참히 좌절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결코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탄의 늪에 빠진 인류를 기어이 구원하여 본연의 에덴으로 되돌려 놓으시겠다는 복귀섭리의 뜻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천 년이든 만 년이든 그 뜻을 절대적으로 밀고 나가십니다. 수천 년을 이어온 인간의 끊임없는 배신 앞에서도 하늘부모님은 인류라는 자식을, 그리고 지상천국이라는 우주적인 꿈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뜻 성사에 대한 상대적 예정과 5퍼센트의 비밀
뜻 자체는 이처럼 절대적일지라도 그 뜻이 현실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일방적인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기독교의 낡은 운명론을 산산조각 내는 위대한 상대적 예정의 법칙이 등장합니다.
하늘부모님은 인간을 프로그램된 기계나 꼭두각시 로봇이 아니라 당신과 대등하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격적 주체이자 공동 창조주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환경적 투입인 구십오 퍼센트가 먼저 주어지더라도 반드시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책임분담 오 퍼센트가 합해져야만 비로소 뜻이 백 퍼센트 실체로 성사될 수 있습니다. 비록 오 퍼센트이지만 이것은 백 퍼센트를 결정짓는 절대적 조건입니다.
만약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유혹을 이겨내어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했다면 에덴동산의 지상천국은 그때 곧바로 성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했기에 뜻의 성사는 좌절되고 섭리는 기나긴 세월 연장되었습니다. 즉 구원과 천국이 도래하는 시기는 달력에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언제 자신의 책임분담을 자발적으로 완수하여 하나님의 구십오 퍼센트와 합을 이루느냐에 따라 그 성취 여부와 시기가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해진 운명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 땅에 실체로 꽃피우게 할 열쇠를 쥔 위대한 동역자들입니다.

중심인물에 대한 예정과 섭리의 플랜 B
하늘부모님은 멈춰버린 복귀섭리를 이끌어 가기 위해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할 특별한 인물을 부르십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세례 요한과 같은 역사 속 선지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인물을 부르실 때는 명확하고도 공의로운 조건이 있습니다. 선한 조상의 혈통으로 태어났는가, 섭리에 필요한 성품과 인격적 경험을 갖추었는가, 하늘이 부르실 때 즉각 응답할 수 있는 시대적 환경에 있는가 등 엄격한 섭리적 기준들을 종합하여 그 시대에 가장 합당한 인물을 부르십니다.
그러나 하늘이 아무리 공들여 가장 적합한 인물을 선택하셨다 하더라도 그 인물이 자신의 오 퍼센트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칼뱅의 예정론이라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무조건 백 퍼센트 성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원리적 관점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중심인물이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불순종하거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해 버리면 그에게 주어졌던 거룩한 사명은 무참히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만약 하늘이 공들여 택한 중심인물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배신하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될까요. 뜻 자체는 절대적이므로 하나님은 결코 인류 구원을 포기하시지 않고 새로운 인물을 찾아 섭리의 바통을 이어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애달픈 플랜 B입니다.
하지만 이 플랜 B는 직장에서 서류의 결재권자를 바꾸듯 쉽고 가볍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쳐서 가나안 입성의 섭리가 연장되었을 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끝내 불신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비극이 초래되었을 때, 가룟 유다가 은 삼십 냥에 사랑하는 스승을 팔아넘겼을 때, 굳게 믿었던 자식, 수천 년을 공들여 키워낸 중심인물이 배신하고 돌아설 때 하늘부모님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피눈물을 흘리셔야만 했습니다. 한 인물이 실패하면 하나님은 또 다른 인물을 찾아 세우기 위해 기나긴 세월 동안 또다시 탕감의 조건을 쌓으며 모진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합니다.
운명을 개척하는 자유의지, 그리고 우리의 사명
원리강론의 예정론은 단순한 신학적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배신하는 자식들을 향해 끝없이 기회를 주시며 상처받은 가슴을 부여안고 또 다른 자식을 찾아 밤새워 헤매시는 어머니 하나님의 피눈물 나는 기다림과 사랑의 기록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불행이나 뼈아픈 실패는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셔서 억지로 예정하신 저주가 아닙니다. 반대로 나의 구원 역시 내가 가만히 소파에 누워있는다고 해서 하늘이 알아서 떠먹여 주시는 값싼 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룰 가장 소중하고 유일무이한 중심인물로 예정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당당히 응답하여 영광스러운 축복의 주인공이 될 것인지,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여 하늘부모님의 가슴에 또다시 대못을 박고 슬픈 플랜 B의 비극을 만들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결단과 참사랑의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오 퍼센트이지만 나의 백 퍼센트인 이 책임분담이야말로 운명을 개척하는 열쇠입니다.
천일국의 시대가 밝았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메시아로서의 혹독한 책임분담을 처절한 사투 끝에 백 퍼센트 완수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제 그 섭리의 바통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우리는 운명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무기로 사탄의 굴레를 박차고 일어나 하늘부모님의 잃어버린 꿈을 내 가정과 내 나라에 실체로 이룩해 낼 위대한 천일국의 운명 개척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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