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크고 두려운 미지의 벽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안겨준 위대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종종 성서에 기록된 부활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심각한 신학적 모순과 맹신에 빠지곤 했습니다.

육신 부활론의 오해와 창조원리의 관점

수많은 신앙인들이 마지막 심판의 날 천사장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 땅속에서 썩어 흙이 된 시체들이 다시 뼈를 맞추고 살이 붙어 물리적인 육신으로 살아날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적 육신 부활론은 현대 과학의 이성적 사고와 정면으로 충돌할 뿐만 아니라, 화장을 했거나 짐승에게 먹힌 순교자들의 육신은 도대체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신학적 논쟁마저 낳았습니다.

애초에 하늘부모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 애벌레가 낡은 허물을 벗고 찬란한 나비로 탈바꿈하듯 인간의 육신 역시 수명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흙으로 돌아가도록 설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을 터전으로 성숙해진 무형의 영인체만이 영원한 천상천국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지으셨습니다. 즉, 육신의 물리적 죽음 자체는 타락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진 끔찍한 형벌이나 저주가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러운 우주의 순환이자 창조의 법칙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죽음과 생명의 본질

그렇다면 성서가 그토록 강조하는 죽음과 생명, 그리고 부활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통일원리는 생사와 부활의 개념을 단순한 생물학적 심장 박동의 차원이 아니라, 철저히 하늘부모님과의 심정적 관계와 소속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명쾌하게 해명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는 그 과일을 따먹은 후에도 무려 900년 이상 육신을 입고 자식을 낳으며 멀쩡히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신의 물리적 죽음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죽음이란, 하늘부모님의 참사랑의 품을 떠나 사탄의 지배 아래로 곤두박질쳐 버린 영적인 단절상태를 뜻합니다. 반대로 진정한 생명이란 하늘부모님의 품 안에 온전히 머무르며 그분과 심정적으로 호흡하고 교류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 역시 죽음의 두 가지 의미를 정확히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부활은 영적 회복의 점진적 과정입니다

따라서 부활이란 죽은 시체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마술이 아닙니다. 사탄의 주관권에 갇혀 신음하던 타락한 인간이 탕감복귀의 과정을 거쳐 하늘부모님의 품으로 그 영적 소속과 혈통, 그리고 심정을 서서히 전환해 나가는 거룩하고도 역동적인 영적 회복의 과정입니다.

사탄의 핏줄과 엮여 영적으로 완전히 질식해 버린 인류가 단숨에 하늘부모님의 품으로 날아오를 수는 없습니다. 깊고 어두운 우물에 빠진 사람이 동아줄을 잡고 한 걸음씩 땀을 흘리며 벽을 딛고 올라와야 하듯, 인류 역시 역사적 시대마다 하늘이 허락하신 탕감의 조건을 세우며 영적 생명을 점진적으로 회복해 왔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탕감조건을 통해 종의 자리에서 소생 부활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이어 신약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고 세례를 받는 조건으로 양자의 자리에 오르는 장성 부활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종이나 양자의 신분으로는 완전한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오늘날 천일국 시대에 이르러, 인류는 이 땅에 오신 실체적 참부모님을 모시고 축복결혼을 통해 원죄의 뿌리를 뽑아버림으로써 하늘부모님의 직계 참자녀로 거듭나는 완성 부활의 눈부신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단계적으로 이어져 온 이 부활의 섭리는, 병든 자식을 한 번에 고칠 수 없어 쓴 약을 먹여가며 조금씩 기력을 회복시켜 마침내 건강한 본연의 아들딸로 품에 안으시려는 어머니 하나님의 피눈물 나는 간호와 수고의 역사입니다.

육신 생활의 절대적 가치, 천국은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원리적 부활론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하고 실존적인 메시지는 바로 육신 생활의 절대적인 가치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오랜 금욕주의와 이원론은 육신을 죄의 도구로 폄하하고,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오직 죽어서 가는 사후 천국만을 맹목적으로 소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결코 저주받은 영혼의 감옥이 아닙니다.

육신은 우리의 영인체가 하늘의 생명력을 공급받아 완성된 인격체로 자라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옥한 토양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적은 내가 죽어 무덤에 들어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숨 쉬는 오늘 하루, 내가 밟고 선 가정과 직장에서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밉고 원망스러운 이웃을 참사랑으로 품어 안기 위해 눈물겨운 정성을 투입할 때, 내 육신을 통해 발생하는 생력 요소가 내 영인체를 찬란한 빛의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천국은 죽어서 옥황상제의 심사를 받고 들어가는 낯선 공간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육신을 입고 내 주변을 참사랑의 공동체로 변화시켜 지상천국을 실체로 맛본 사람만이, 그 심정의 호흡을 그대로 이어 영원한 천상천국으로 자연스럽게 입성하는 것입니다. 하늘부모님은 우리가 죽음 이후의 막연한 환상에 매달리기보다, 두 발을 대지에 굳게 딛고 땀 흘려 참사랑을 실천하는 당당한 부활의 실체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재림부활, 영계와 지상의 상생 구원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절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지상에서 육신을 쓰고 부활을 완성하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과거의 수많은 조상들과 타종교인들, 선의의 영인들은 영원히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것일까요. 기성 종교는 그들을 지옥의 불길 속에 던져버렸지만, 하늘부모님은 결코 억울한 자식을 영원한 형벌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육신이 없는 영인들이 부활하기 위해 하늘이 섭리적으로 마련하신 기적 같은 은혜의 법칙이 바로 재림부활입니다.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윤회설은 한 번 주어진 개성진리체의 영원한 가치를 부정하는 비원리적 해석입니다. 영계의 영인들은 다른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살고 있는 자신의 후손이나 영적 기준이 맞는 지상인들에게 영적으로 재림하여 그들을 돕습니다.

지상인이 그 영인들의 영적 협조와 감동을 받아 선한 뜻을 이루고 책임분담을 완수하면, 지상인이 얻는 부활의 혜택이 그를 도왔던 영인에게도 고스란히 혜택으로 돌아가 함께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는 놀라운 상생의 법칙입니다. 이는 타락한 인류 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기어이 지옥 밑바닥의 영혼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구원하시려는 하늘부모님의 치밀하고도 위대한 사랑의 그물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지상 흙바닥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어깨 위에는 나 한 사람의 구원뿐만 아니라, 나를 돕기 위해 강림해 있는 수많은 선조들의 해방과 부활이라는 벅찬 우주적 책임이 얹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