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아부다비, 교황과 대이맘이 던진 질문
2019년 2월 아부다비에서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와 이슬람 최고 권위기관 알-아즈하르의 대이맘 아흐마드 알-타예브가 '인류 형제애 선언'에 공동 서명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두 분이 믿는 신은 같은 신입니까?" 교황은 "하나님은 하나입니다"라고 답했고, 대이맘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는 같은 신일까요? 이슬람은 삼위일체를 다신론으로 간주합니다. 힌두교의 브라흐만, 불교의 불성, 도교의 도는 과연 '신'이라는 범주에 들어올까요? 불교는 인격신 개념 자체를 거부하지 않습니까?
세계경전은 이 질문에 성급하게 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40여 개 종교의 경전이 신에 대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먼저 나란히 펼쳐놓습니다.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어떻게 신을 알 수 있는가 — 인식의 세 가지 길
세계경전 제1장은 13개의 소주제로 신의 다양한 속성들을 다룹니다. 첫 번째 소주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신의 존재를 묻기 전에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서양 철학 전통에서는 이성의 길과 계시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계경전은 더 다양한 경로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피조물을 통한 인식입니다. 로마서는 "창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이 분명히 알려져 있다"고 말합니다. 꾸란도 "하나님은 대지 위에서, 그리고 인간의 영혼 속에서 예증들을 보여주신다"고 합니다. 자연 세계가 신의 손길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면을 통한 인식입니다. 힌두교 우파니샤드의 명상 전통, 도교의 직관적 체험이 이 경로에 속합니다. 신이 바깥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초자연적 계시의 길입니다. 예언자들과 성인들이 직접 체험한 신과의 만남입니다.
17세기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죽을 때까지 코트 안감에 꿰매고 다녔던 메모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파스칼이 발견한 것처럼, 신은 이성이 아니라 심정으로 감지됩니다.
한 분 하나님 — 가장 뜨거운 신학적 쟁점
두 번째 소주제 '한 분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여덟 글자입니다. 7세기 이슬람이 기독교 세계와 만났을 때 첫 번째 충돌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무슬림들이 보기에 삼위일체론은 명백한 다신론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세 위격이지만 하나의 본체'라고 답했지만, 이슬람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힌두교의 대답입니다. 수백만의 신들이 있지만, 그 모든 신들은 하나의 절대 실재 브라흐만의 현현이라는 것입니다. 리그베다는 이미 기원전 1500년경 "오직 하나뿐인 이, 현자들은 그를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고 선언했습니다. 3,500년 전 인도의 한 시인이 종교다원주의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말씀선집은 이 긴장의 핵심을 명쾌하게 짚습니다. 각 종교가 절대자를 서로 별개의 존재로 보기 때문에 분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각 종교는 신의 한 속성, 한 측면을 파악한 것이며, 그것들을 통합해야 신의 전모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협이 아닙니다. 더 높은 차원의 신학입니다.
말로 담을 수 없는 신 — 무형과 초월의 역설
신에 관해 말하려는 순간, 언어는 실패합니다. 신을 '전능하다'고 말하는 순간, 신을 '전능함'이라는 개념의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닐까요? 세 번째와 네 번째 소주제 '무형과 신비', '초월적 실재'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도덕경의 첫 문장이 이것을 압축합니다. "말로 표상해 낼 수 있는 도는 항구불변의 본연의 도가 아니다." 가장 심오한 진실은 말해질 수 없습니다. 꾸란은 "어떤 시각으로도 그분을 인식할 수 없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있습니다.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나 있습니다.
말씀선집이 이 역설에 가장 인간적인 언어를 입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눈앞에 나타나 지적하고 간섭하신다면, 우리는 신경쇠약에 걸려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신비가 아니라 사랑의 배려라는 것입니다.
전능과 전지, 그리고 인내의 신학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소주제는 '주권과 전능', '전지성과 편재성'을 다룹니다. 철학자들이 자주 이의를 제기하는 속성들입니다. '전능한 신이 자신도 들지 못할 만큼 무거운 돌을 만들 수 있는가?' 같은 역설적 질문이 제기됩니다. 전능하고 전지하다면 왜 악을 허용하는가라는 물음도 있습니다.
말씀선집이 독특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전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참을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을 참으시는가를 다룹니다. "하나님은 한번 결심하면 몇 천 년이고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전능은 무엇이든 즉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원칙을 영원히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인내와 자기절제가 오히려 더 강한 힘이라는 것입니다.
꾸란의 "하나님은 인간의 목에 있는 혈관보다 가까이 있다"는 표현은 편재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우주 전체에 퍼져 있는 신이 동시에 내 목의 혈관보다 가깝습니다. 이 역설이 이슬람 수피 신비주의의 핵심 명상 주제가 되었습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 내재와 마음 속에 머무름
일곱 번째 소주제는 '내재와 마음 속에 머무름'입니다. 신학에서 초월과 내재의 긴장은 가장 오래되고 깊은 것 중 하나입니다. 초월만 강조하면 신은 멀어집니다. 내재만 강조하면 범신론으로 흐릅니다.
각 종교 전통이 이미 오래전에 이 해법을 각자의 방식으로 찾았습니다. 시크교 경전은 말합니다. "향기가 꽃 속에 머물듯, 사물이 거울 속에 비쳐 있듯, 신이 만유에 거하나니, 그대 안에서 신을 구하라." 불교 선종은 "바로 이 마음이 부처"라고 선언합니다. 기독교 요한복음은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말씀선집의 증언이 가장 강렬합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맥박을 듣고 삽니다. 하나님과 호흡을 같이하며 하나님의 체온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맥박, 호흡, 체온. 이보다 더 구체적인 내재의 표현은 없습니다.

불변과 영원, 그리고 최초의 원인
여덟 번째부터 열 번째 소주제는 '불변과 영원', '최초의 원인', '하나님의 선'을 다룹니다. 불변하고 영원한 존재가 우주의 최초 원인이며, 그 원인이 선하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논리입니다.
신의 불변성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후회했다'고 말하는 구절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말씀선집이 이 긴장을 독창적으로 해결합니다. 신의 불변성을 수동적인 정지 상태가 아니라 능동적인 신의(信義)로 재해석합니다. 신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약속을 영원히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계적 불변성입니다.
마태복음은 신의 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신의 선은 보상과 처벌의 윤리가 아닙니다. 선하든 악하든 구별 없이 내리쬐는 햇빛처럼 무조건적입니다.
신성한 사랑과 자비 — 모든 전통이 동의하는 유일한 속성
열한 번째 소주제 '신성한 사랑과 자비'는 13개 소주제 중 가장 방대하게 다루어집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 전통에서 신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으로 동의하는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사랑하고 자비롭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주요 종교가 동의합니다.
이슬람 무슬림들이 기도를 시작할 때 반드시 외우는 구절이 '비스밀라히 르-라흐마니 르-라힘' — '자비롭고 자비를 베푸시는 알라의 이름으로'입니다. 하루 다섯 번 기도가 모두 자비로운 신의 이름으로 시작됩니다. 불교는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지만 '대비심(大悲心)'은 보살 수행의 핵심입니다.
힌두교 바가바드기타의 경문이 혁명적입니다. "사랑함으로써 내가 누구인지를 진실로 알게 된다." 신 인식의 방법으로 사랑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논리로 신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이 신을 아는 가장 깊은 방법입니다.
말씀선집이 이것을 가장 실천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위해 살려고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동기로 이어집니다. "하나님도 역시 혼자 있으면 사랑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동기, 알파적 기원도 사랑입니다."
창조자 — 사랑 때문에 세계를 만들었다
열두 번째 소주제는 '창조자'입니다. 창조론은 종교 간 가장 깊은 신학적 차이가 드러나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창조의 방식보다 더 근본적인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창조의 동기입니다. 무엇을 위해 신은 세계를 만들었는가?
창세기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기쁨입니다. 이슬람 하디스는 '나는 숨겨진 보물이니, 나를 알리기 위해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표현입니다. 힌두교는 '브라흐마의 창조는 유희다'라고 말합니다. 넘쳐흐르는 풍요로움입니다. 플라톤은 신이 창조하는 이유를 '질투 없는 선의'라고 했습니다.
이 다양한 창조 동기들이 가리키는 하나의 방향이 있습니다. 창조는 강요가 아니었습니다. 신은 창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원함의 이름이 각 전통에서 다르게 불립니다. 그러나 방향은 같습니다.
하늘 부모 — 지식에서 관계로, 경외에서 친밀함으로
마지막 소주제는 '하늘 부모'입니다. 이 장의 첫 번째 소주제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이 '하늘 부모'로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지식에서 관계로, 신학에서 심정으로, 경외에서 친밀함으로의 여정입니다.
신을 '부모'로 부르는 것은 모든 종교 전통에서 나타납니다. 기독교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힌두교에서 크리슈나는 "나는 이 세상의 아버지요 어머니다"라고 선언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모든 인간 관계 중 가장 무조건적인 사랑이 작동하는 관계입니다.
말씀선집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참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참어머니이시기도 합니다." 부성(父性)과 모성(母性) — 이 두 사랑의 형태가 모두 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강한 정의와 어머니의 부드러운 자비가 신 안에서 하나로 통합됩니다.
이 장 전체를 돌아보면 1번에서 '어떻게 신을 아는가'를 물었고, 13번에서 그 앎의 최종 형태가 무엇인지를 답합니다. 신을 가장 깊이 아는 것은 신을 부모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학적 지식이 아니라 심정적 관계. 이것이 40여 개 종교가 그 모든 다양성 속에서도 공통으로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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